계묘년 시산제

2023. 3. 18. 22:41일상다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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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지금이다. 삼십사 개월 군 복무를 마치고 선택한 일자리가 평생 직업 되어 사십 년 세월을 보냈다. 지금은 작은 법인에 출근하지만 모든 욕심이 사라지고 없으니 의식 차원이 그때와 같지 않다. 만사가 평안하니, 나만 사고[뇌졸중, 치매 등] 치지 않으면 꽃동산에 사는 거다.
 
애정하는 등산 모임의 시산제를 지냈다. 한 직장에서 등산학교를 수료한, 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요산요수 한 지 삼십여 년. 형은 여든, 동생은 환갑 지났으니 터울이 이십 년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회장은 두 번째고, 사무총장은 시종일관 그대로다. 종신직인 셈이다. 시산제 준비도 해마다 그가 한다. 작년에 직장을 은퇴했지만, 불평 내색 없이 솔선하니 시등회가 즐거움을 유지하며 단합할 수 있다.
 
시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에 지내다가 올해는 윤이월이 있어 늦추었다. 모임 초기에는 제수용으로 돼지머리를 준비했으나 수육으로 대체한 지 오래다. 팥고물 얹은 뜨끈뜨끈한 시루떡은 마음을 사로 잡는 제물이어서 이ㅇ호 고문님이 후하게 세 되를 준비했다. 나머지 제수용품도 알이 굵은 좋은 것들로 정성껏 마련했다. 최근에 산불이 잇따랐고 전국에 건조주의보가 발령되어 제를 지내면서 촛불을 켜지 않고 향에도 불을 붙이지 않았다. 회원들의 정성과 공경심을 신령님이 이해하실 거로 믿는다. 
제를 모신 후 단체 음복했다. 한 해 딱 한 번, 내가 막걸리를 마시는 날이기도 했다. 우윳빛 그것이 전신에 짜르르 번지니 진달래처럼 행복 꽃이 피었다. 우리는 산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는 멋진 사람들이 모여 산행하는 시등회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한 시절을 은유하는 말
 
 

회장님 초헌례 후 수암 선생이 축문을 읽었다.
유세 차, 계묘(癸卯)년 을묘(乙卯)월 을해(乙亥)일, 대구광역시 시등회 전*수 회장과 그 회원은 계묘년 새해를 맞아, 아름다운 옥연지와 송해 공원을 보담은 함박산 기슭의 능선을 찾아와 마음을 다잡아 천지신명께 삼가 고하옵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시등회 회원들은 산자수명한 우리 강산을 흠모하여 그동안 삼십여 년 넘게 꾸준한 산행을 통해 자연을 배우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회원들과의 정의(情誼)를 소중히 여기고 있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만물이 땅의 기운으로 무성하게 자라는 희망이 솟는 계묘년에는 간절히 비옵나이다. 세월이 흘러 회원들이 모두 희생 봉공, 선공후사하던 관직을 떠나 이제 다 함께 자연을 즐기는 기회가 찾아왔나이다. 계묘년에는 우리 시등회 회원이 단합된 마음으로 일 년 열두 달 안전하고 건강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회원 가족들 또한 건강하고 화목하도록 진정으로 소원 하나이다. 전*수, 박*진, 최*완, 김*영, 김*구, 나*연, 남*락, 박*춘, 박*동, 박*률, 배*식, 손*락, 이*기, 이*호, 임*기, 황*엽 회원이 저마다 뜻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름 석 자를 일일이 거명하오니 천지신명의 가피가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나이다. 또한, 대구시 정부는 계묘년을 대구 굴기(屈起)의 해 원년으로 정하여 미래를 향한 시민 정신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아 진력하고 있사오니 아낌없이 보살펴 주시기를 비옵나이다. 이에 우리 회원들이 간소한 술과 음식을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시고 저희 소원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계묘(癸卯)년 을묘(乙卯)월 을해(乙亥)일 대구광역시 시등회 회장 전*수 외 회원 일동
고문님이 아헌례했다.
부회장에 이어 회원들이 돌아가며 헌작했다.
종헌례는 시등회 막내, 사무총장이 했다.
사신례
귀중한 절값은 일 년 운영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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