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11. 08:47ㆍ여행의 추억

용탑선원은 해인사의 크고 작은 암자 중 해인사와 가장 가깝다. 일주문에서 템플스테이로 가는 길에 가야산을 오르는 길목(토신골 탐방로 입구)에 있다. 계류를 가로지르는 극락교 앞에 ‘3·1독립운동 민족 대표' '용성 조사 유적 도량’이라고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이 용탑선원의 의미를 드러낸다. 다리 밑으로는 가야산 정상에서 출발한 물줄기가 제법 아우성을 지르며 흘러내린다.
용탑선원은 3·1독립운동 민족대표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선사를 기리려고 1945년에 세운 절이다. 백용성 선사의 법명 용(龍)자와 사리탑의 탑(塔) 자를 택해 용탑선원(龍塔禪院)이라 이름 지었다. 백용성 선사는 한문 경전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 출간했으며, 일제강점기 왜색화된 계율을 불교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는 데 전력했다. 또한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과 해인총림 방장을 역임한 고암(1899~1988) 대종사가 수십 년간 주석하다가 열반한 곳이기도 하다. 경내에는 일곱 부처를 봉안한 법당인 칠불보궁과 석조 미타굴 등이 있으며, 현재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2(보물)를 소장하고 있으며, 용성 선사와 고암 대종사 두 분의 부도와 탑비가 서쪽 기슭에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사명당의 부도가 지척이다. (2025.5.8.)

* 백용성(1864~1840) 선사: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출신으로 대각교를 창립한 승려이자 한말의 독립운동가다. 16세에 해인사 극락암에서 출가해 1906년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 측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 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 종단의 정화를 위해 힘쓰고, 일본의 종교 정책에 반대하고 불교 대중화를 위해 한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저술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22년 중국 연길에 대각 교당을 설립해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려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고암당(1899~1988)상언 대종사는 1917년 19살에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3·1운동 당시 독립 만세운동을 펼쳤다. 1922년 용성 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고 전법계를 받았다. 이후 직지사 천불선원과 통도사 극락선원, 해인사 용탑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수선 안거하고 해인총림 방장과 조계종 3대, 4대, 6대 종정을 역임했다.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 명칭: 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 지정(등록)일: 2009.12.3.
* 소재지: 해인사 용탑선원
* 국가유산청 해설(요약)
ㅡ부도(사리탑) 총고: 311cm
ㅡ탑비 총고: 341cm
ㅡ현상 및 특징: 용탑선원의 입구 쪽으로 용성선사의 사리탑과 탑비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전반적인 상태는 먼지로 인해 표면이 약간 변색되어 있은 정도이지만 양호한 편이다. 사리탑과 탑비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용성선사 부도
고승의 묘탑이라고 불리는 부도로 일반 부도의 형식에서 벗어나 탑 형식을 빌렸다. 상하 이중 기단 위에 3개의 탑신을 얹은 평면 방형의 일반 석탑형이다. 각각의 특징은 상하 기단에는 우주와 각 면에 각각 1주씩의 탱주가 모각됐으며, 하층 기단 위에는 상층기단을 받기 위한 얕은 기단 받침이 몰딩 되어 있고, 상층기단 위도 탑신을 받치기 위한 탑신받침이 있다. 탑신과 옥개는 각각 一石造이다. 옥개는 낙수면이 두껍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옥개의 층급받침은 5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을 두었다. 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강원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1388년) 2기 외에는 없는 희소한 형식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단정하다. 비슷한 높이의 이중 기단이나 3층의 탑신 형식 등은 해인사의 길상탑을 모방해 조성된 것이다.
2. 용성선사 탑비
귀부, 비신, 이수가 갖추어진 탑비는 이중의 지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귀부는 사지에 힘을 주어 웅크리고 있는 자세를 갖추고, 머리는 龍頭化하지 못한 모습이다. 귀부 상면은 전체적으로 귀갑문으로 조각하고 하단에 당초문대를 돌렸으며, 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방형비좌는 가장자리가 중엽 연판으로 장식돼 있다.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올렸는데 이수는 마주하는 2마리의 반룡이 장식됐다. 비신에는 용성선사의 출생, 수행, 활동 내용과 그의 입적에 관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비신의 우측면에는 龍雲謹撰 吳世昌篆(용운근찬 오세창전) 하여 한용운이 비문을 짓고, 비신의 두전을 오세창이 썼음을 기록했다. 이 석비는 근대의 건조물이지만 조각의 형태와 수법이 좋으며, 조선시대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다. 무엇보다 탑비의 중요성은 용성선사의 탁월한 업적을 근대 문학과 예술을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 조성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3. 조사자 의견
용성선사의 부도는 일반 고승의 부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삼층 석탑으로 조성되어 더욱 예우 추앙한 뜻이 엿보이며, 이는 부도 옆에 세워진 탑비가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즉 용성선사와 함께 삼일 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 대표자 중에 포함되었던 한용운 선생이 비문을 짓고, 오세창 선생이 탑비의 頭篆(두전)을 하였다는 점은 용성선사가 근대 역사에 얼마나 큰 족적을 남기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비록 예술적인 가치로써 미약한 점이 없지 않다고 판단되지만 독립투사 3인이 이루어낸 역사적인 산물로써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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