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덕봉정사

2025. 5. 4. 08:39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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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정자3길 11-6 (마동)


* 덕봉정사(경북도 문화유산자료)
* 지정(등록)일: 1995.12.1.
* 국가유산청 해설

덕봉 이진택(1738∼1805)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이진택은 조선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 병조 정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을 지낸 바 있다. 또한 1793년 사노비 혁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사노비를 없애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순조 1년(1801)에는 공노비 해방을 보게 되었다.
광무 9년(1905)에 그의 증손인 이우영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이 정사는 토함산 기슭에 있으며 주변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건물은 'ㄴ'자 형태로 짓고, 앞에는 작은 연못을 두어 먼 곳의 넓은 들판과 함께 수려한 자연 경관을 이룬다.


덕봉정사


* 탐방 노트: 덕봉정사(德峯精舍)는 조선 시대 문신인 덕봉 이진택(1738∼1805)을 추모하려고 그의 증손인 이우영(1822~1913)이 광무 9년(1905)에 세웠다. 정자 이름을 정(亭)이라 하지 않고, 불교에서 유래한 정사(精舍)를 썼다. 유교에서도 정사는 학문 연구나 정신 수양을 위해 세운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현재 경주이씨 덕봉공파문중에서 소유하고 관리하는 120년 된 문화유산이다.
덕봉정사는 -조성 시기를 알 수없는- 인공 연못을 앞에 두고 건물을 'ㄴ'자 형태로 앉혔다.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방을 만들고, 창틀 위에 여의주를 문 용두를 조각해 마주 보게 붙였다. 누마루와 대청마루를 툇마루로 이어지도록 하고 연못 쪽으로 계자 난간을 설치했다. 누마루 천장에 연 꽃턱 모형을 두 개 만들어 넣었다. 마루 밑에 받치는 누하주는 폐사찰에서 가져온 석재를 이용해 세웠다. 기둥 중에서 하나는 목재만 사용했다. 덕봉정사와 경모재, 덕봉헌 등 현판은 서예가 해사 김성근이 썼다. 대청마루를 장식한 덕봉정사기 등 기문들을 사진으로 붙여두어 이색적이었다. 덕봉의 묘는 정사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 (2025.4.26.)

덕봉정사의 현판 3개는 서예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의 글씨. 그는 27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해 성균관대사성, 규장각직제학, 홍문관제학, 이조판서, 예조참판, 전라도관찰사, 대한제국 수립 후 법부대신, 탁지부대신을 역임했다. 범어사 등 사찰의 편액을 많이 남겼다.
景慕齋에는 七十參翁(칠십삼옹)을 덧붙였다. 해사가 73세인 1908년에 썼다.
서쪽 덕봉헌 방문 위의 용머리 조각.
동쪽 경모재의 용두. 대청마루 기문들은 사진 액자. 기문의 보존과 분실 방지를 고려한 듯하다.
누마루 천장의 연(蓮) 꽃턱.
대청에서 바라본 연못.
누하주는 폐사찰에서 가져온 자재로 세웠다.
ㄴ자 형태의 정자
누마루 천장의 꽃턱과 연못이 어울린다.
연못 끝에서 바라본 덕봉정사 전경

[정자] 54. 경주 덕봉정사(德峰精舍)

덕봉 이진택(李鎭宅·1738~1805)은 낭만가객이었고 풍운아였다. 소신 있는 행정가였고 세상을 바꾸는 개혁가이기도 했다. 정조 재위 시절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 전적 예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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