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1. 10:38ㆍ여행의 추억

* 합천 해인사 홍제암 - 보물
* 국가유산청 해설(요약)
<홍제암>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다. 광해군 6년(1614)에 혜구대사가 사명대사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다.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인법당(因法堂) 형식의 건물 1동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 인법당과는 달리 사명대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기능의 공간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기본 평면은 工 자형으로 가운데 법당을 중심으로 조사전, 영각, 홍각, 조실, 시자실 등이 있으며, 각각의 공간은 툇마루를 통해 모두 연결되고 있다.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홍각과 지장전은 돌출된 누각형으로 만들고, 법당 및 다른 공간은 단층의 구조로 만드는 재미있는 공간 배치를 보여준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구성한 공포의 수법도 각 공간의 위계에 따라 달리 표현하였으며, 기둥과 기둥의 간격인 칸의 크기도 각 공간의 기능에 따라 각기 달리하였다. 밖으로 노출된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하고 안에 있는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처리한 점도 특이하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보물)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홍제암은 여러 기능의 공간이 하나의 건물 안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의 암자로, 각 공간의 위계와 기능에 따라 건물 구조나 양식의 수법을 여러 형태로 표현하고 있어 역사적 의의뿐만 아니라 건축적인 가치가 크다.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 보물
* 국가유산청 해설(요약)
사명대사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승려로, 이곳 홍제암에서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홍제암의 북동쪽 약 20m 지점의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사명대사탑은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탑으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루었는데,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광해군 4년(1612)에 세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 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이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문장이 매우 빼어날 뿐 아니라 비문에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역사적인 가치도 높다. 사명대사의 탑과 석장비는 본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이러한 형식은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의의가 있다.

* 탐방 후기: 사명대사의 생가지(경남도 기념물)를 다녀온 후 국가유산청 앱을 훑어보니 사명대사가 입적한 <홍제암>과 <탑과 석장비>가 보물로 지정돼 있어, 오늘 다녀왔다.
산사는 조용했다. 뒷산에서 간간이 나무 베는 전동 톱질 소리가 들렸다. 기계음이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한가함을 깨울 정도였다. 밀양 표충비각을 지키는 홍제사(弘濟寺), 초상을 모시려고 건립한 해인사 홍제암(弘濟庵) 등 두 사찰 이름이 홍제(弘濟)다. 사명대사의 별칭으로 '널리 구제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작명에 대사를 숭앙하는 성심이 깃들었다. 현지를 탐방하면서 대사의 고귀한 생애를 받들고 후세에 남기려는 지성이 느껴졌다.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1608년 선조의 하사로 창건해 말년까지 수도하다가 입적한 곳이다. 1614년 건물을 새로 지었다. 현존 건물은 1979년 완전히 해체하여 다시 복원했다. 건물이 여느 사찰의 전각과 달리 효율적이었다. 한 건물 안에 법당과 조사전, 표충사, 영가를 모신 지장전(?) 등이 있어, 툇마루에서 문만 열면 됐다. 사명대사를 비롯해 열일곱 분 고승의 진영을 모신 방(表忠祠)에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은 영정도 보였다. 박정희는 국민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지도자다. <석장비(石藏碑)>는 일제강점기 때 호된 시련을 겪었다. 세운 지 311년이 지난 1943년, 일제 경찰에 의해 네 조각으로 동강 났다. 비는 광복이 되고 나서 1958년 복원했다. 붙인 자국이 열 십(十)자로 수술 흉터처럼 뚜렷하다. 일제강점기의 혹독했던 상황이 상상되면서 한편으로 사명대사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도 실감 났다. 사리를 봉안한 <비(부도)>는 대사가 입적한 2년 후 1612년(광해군 4년)에 세웠다. 부도는 석장비가 세워진 담장을 돌아 뒷산으로 200여 미터 걸어가 고즈넉한 곳에 홀로 있었다. 늦은 오후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었다. 부도를 껴안았다. (202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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