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첨백당과 광복소나무

2025. 3. 14. 16:57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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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백당과 광복소나무 전경.


지난해 가을, 우연히 '태극기 사진 전시'를 구경했다. 행사를 주최한 <광복소나무사랑모임>의 팸플릿에 '1945.8.15. 첨백당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글귀를 읽고 의미 있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동안 차일피일하다가 오늘에야 나섰다.
평광동은 대구에서 아직 사과를 재배하는 깊은 골짝이었다. 팔공산 올레 4길 왕건길이 지나는 코스의 어느 끝부분에 130살 먹은 첨백당이 숨은 듯 자태를 드러냈다. 고옥이 대체로 그렇듯이 수수하고 고아한 정취를 자아냈다. 재실은 동향으로 한일자형 맞배지붕에 내림지붕을 달았다. 좌우의 툇마루가 건물의 격을 높였다. 앞마당 양쪽 가장자리에는 잎을 떨어트린 키다리 은행나무가 경호원처럼 서 있고, 그 복판에 광복일 날 심었다는 소나무가 만세 부르듯 두 팔을 벌려 푸른 솔잎을 받쳐 든 형상이, 은근히 기쁨을 상징한다. 앙상한 가지의 은행나무 때문일까? 광복 소나무는 푸른 정기를 마구 내뿜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선배의 과수원에 들러 평광사과 부사 한 박스를 샀다. (2025.3.12.)


첨백당(瞻栢堂) 의미는 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고 한다.
건물은 한일자 구조로 동향이다.


* 첨백당(瞻栢堂)
* 대구시 문화유산자료
* 국가유산청 설명(요약)

우효중의 효행과 우명식의 충성심을 기리며, 광리에 거주하는 단양 우씨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첨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명식 선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고종 33년(1896)에 지었고 1924년 새롭게 고친 적이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집 가운데 대청마루가 양쪽 툇마루보다 높게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아담하게 둘러놓았다.


1945.8.15. 광복 날에 심은 소나무


* 광복 소나무
* 대구역사문화대전(동구) 상세 정보(요약)

1945년 8월 15일 단양우씨 집성촌 청년들은 문중 재실인 첨백당에 소나무를 심기로 마음을 모았다. 이들이 광복 소나무를 심은 것은 광복의 기쁨을 조상에게 알리고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광복 소나무는 어린 소나무 세 그루 중 살아남은 한 그루다. 이들은 소나무를 심은 후 논의 갯돌을 가져와 ‘檀紀 4278.8.15. 解放 記念’이란 글씨를 새겼다. ‘광복 소나무’는 광복과 관련한 소나무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높이 6m, 직경 둘레 0.8m, 수령 100년이다.

첨백단 대문에 붙은 편액 이유문(履有門)은 조상들이 밟고 다닌 문이란 의미. 태극기와 광복소나무사랑모임기가 걸려있다.
양쪽 툇마루가 멋스러웠다. 전면 8개 기둥의 주련은 대구에서 활동한 서예가 회산 박기돈(1873~1947) 선생이 휘호했다.
대청마루에 편액·기문·시판 등이 걸려 있다. 「첨백당기」는 조선말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우성규(1830~1905)가 지었다.
마을 진입로 길가에 있는 유허비와 기적비(記績碑).
광복소나무 전경. 故 우하정의 제안으로 심었다. 당초 어린 소나무 세 그루를 심었는데 그중 한 그루가 살았다.
첨백당 대문에서 본 소나무 후경.
원 모양의 가지. 광복소나무라는 이름은 2004년 작명했다.
광복 날 소나무를 식목하고, 논의 물막이 돌에 한자(전서)로 기념 표석을 만들었다.
2014년 문중에서 세운 광복소나무 유래비.
광복소나무사랑모임에서 건 현수막 <광복소나무 무병장수 기원 막걸리 주기>. 광복소나무사랑모임의 적극 활동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널리 알려지고, 태극기 사랑운동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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