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14. 17:22ㆍ일상다반사
내일은 제78주년 광복절. 일제 35년간의 억압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바닷물도 춤을 춘 빛을 되찾은 날. 수많은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들의 피땀으로 이룩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직도 미발굴 유공자를 찾는 데 정부는 힘쓰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독립운동 활동은 당연했지만, 의외로 이방인도 많았다. 일본 패망, 광복과 관련해 이방인 몇 사람의 자료를 찾아봤다.
호머 베잘렐 헐버트(1863~1949)
미국 선교사, 헤이그 특사 숨은 주역
유언: “나는 웬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헐버트는 미국 목사 가정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1866년 영어 교사로 입국해 서방에 조선을 알리는 활동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일제의 횡포가 심해지자, 적극적으로 자주독립 운동을 지원했는데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은 물밑에서 활약한 그의 공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에도 미국에서 여운형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는 등 조선 독립에 힘썼다. 1949년 광복절을 맞아 국빈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나, 건강이 나빠져 8월 5일 숨을 거뒀다. 1950년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헐버트는 독학으로 3년 만에 우리말을 완벽하게 익혔다. 한글 표기의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를 도입한 주인공이다. 그는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연구소’를 개설했다. 2014년 한글날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
영국 언론인, 정의를 창간한 언론인
유언: “나는 죽지만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하시오.”
베델은 영국 브리스톨 출신으로 1904년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통신원으로 입국했다.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으나, 친일 성향 편집자가 그의 기사를 반려했다. 이에 분개한 그는 회사를 그만둔 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베델은 영일 동맹국 국민 지위를 이용해 신문사를 치외법권으로 주장하며 일제 만행을 적극 고발했다. 일제는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그를 고소했고 재판받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1909년 다시 조선에 돌아왔으나 건강을 잃어 37세 나이로 요절했다. 일제 공작으로 베델의 흔적은 빠르게 지워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잊힌 존재였다. 1968년 정부가 영국 <더 타임스>에 후손을 찾는 광고를 게재해 베델의 며느리와 손주들이 한국을 찾아오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베델 사후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일제의 기관지가 되었다가 광복 후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캐나다 교수, 독립운동의 방패
한글 이름 뜻: “나는 강하고[石) 굳센 호랑이[虎]의 마음으로 한국인에게 필요[必]한 사람이 되겠다.”
영국계 캐나다인 스코필드는 1916년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애비슨 박사 권유로 입국해 교편을 잡았다.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던 그는 우리나라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일본 제국의 형사법 적용받지 않는 자기 신분을 활용해 일제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투신하면서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다. 1919년 3.1운동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취재하고 사진을 찍어 해외에 알렸다. 같은 해 4월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살해 위협을 느껴 1920. 4월 캐나다로 돌아가 한국의 참상을 알리는 데 매진했다. 1958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해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한 그는 석호필(石虎必)이라는 한글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스코필드 기금(The Schofield Fund)을 만들어 수많은 고아와 학생을 도왔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으며, 1970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 제암리 학살 사건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교회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 일제 육군 헌병 주도로 일어났으며 독립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채 소총으로 무차별 난사하고 불을 질러 성인 19명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후세 다쓰지(1880~1953)
일본 변호사, 독립운동가를 위한 웅변가
묘비명 :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일본인 후세 다쓰지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목도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침탈 논리에 회의를 느꼈다. 검사 시절 부당한 기소를 경험하여 인권 변호사의 길을 들어섰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일제의 조선 침탈이었다.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이에 따라 요주의 인물이 됐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영화 <박열>(2017)로 유명한 박열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변호를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관동대지진 여파로 조선인이 학살당하자, 일제와 군부의 조작된 음모라며 강력히 비난했다. 광복 후 1946년 조선 건국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하는 등 평생 우리나라 자주독립에 헌신했다. 일본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반세기 넘도록 건국의 은인을 방치했으나,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도미나가 교지(1892~1960)
일본 군인, 가미카제 특공대의 원흉
자살특공대로 유명한 ‘가미카제’ 폭격을 지시한 장본인. 일본 극우파들은 ‘애국혼의 상징’이라 찬양했지만, 실상은 오판이 부른 참사였다. 1944. 9월부터 1년 남짓 총 62차례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격했고, 전투기 400여 대와 조종사가 사라졌다. 전투기는 짧은 기간에 제작할 수 있으나, 조종사를 양성하려면 십 년 이상 걸린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에 따라 일본 공군 전력은 박살 났고, 제공권을 내준 일본 본토는 미군의 폭격에 유린당했다. 반면에 그는 민간인 대상 범죄를 혐오해 수하 장병들을 철저히 단속했다. 인간적으로는 의인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일본 입장에서는 골칫덩이였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 패망과 광복을 앞당긴 일등 공신이었다.
스기야마 하지메(1880~1945)
일본 군인, 진주만 공습 승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원수였다. 즉 무타구치 렌야와 도미나가 교지의 망발을 최종 승인한 결정권자인 셈이다. 엘리트 군인이었지만, 인맥과 체면을 지나치게 중시해 일본에 해를 끼치고 적국을 돕는 ‘엑스맨 급’ 활약을 펼쳤다. 대표적 사례가 임팔작전과 진주만 공격 승인. 임팔작전은 군부에서 ‘말도 안 된다’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스기야마는 ‘작전을 입안한 무타구치의 체면을 봐서라도 통과시켜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진주만 공격 때는 히로히토 일왕 앞에서 ‘3개월이면 태평양 제해권은 일본 차지’라고 호언장담했다가 일왕이 격노했다. 패전 후 스기야마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유서를 남긴 채 권총 자살했다.
무타구치 렌야(1888~1966)
일본 군인, 일본 육군을 괴멸시킨 무능한 장성
유언: “나는 잘못이 없어, 부하들이 잘못한 거야.”
중장까지 오른 장성이면서 상상을 초월한 무능으로 일본군을 괴멸시킨 장본인.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숨은 독립운동가’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버마(미얀마)를 넘어 인도 북부의 영국군을 치는 ‘임팔작전’을 승인했다. 보급로가 막혀 연전연패하자 야전 사령관들의 정신력을 탓했으며 자신은 매일 기생들과 술판을 벌였다. 작전에 투입된 92,000명의 병력은 4개월 만에 12,000명으로 줄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 아사했다. 임팔작전 실패로 일본 육군은 사실상 괴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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