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8. 11:12ㆍ여행의 추억

올해 세 번째 괘릉(掛陵)을 탐방했다. 카랑카랑한 음성의 해설가님이 괘릉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듣기 쉽도록 해설해 주셨다. 전래하는 설화는 승자의 스토리일 가능성이 크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선덕왕이 죽자, 김경신과 왕위 쟁탈전을 하던 김주원은 785년 1월 알천(북천)이 범람해 건너지 못하는 사이 김경신이 왕궁에 먼저 도착해 왕이 됐다. 겨울에 알천이 범람할 만큼 비가 올 리 없어 김경신의 군사력에 제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경신이 신라 제38대 왕으로 즉위하고부터 912년 4월 제52대 효공왕 사망 때까지 127년 동안 원성왕 가계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후대에 원성왕릉의 묘호를 열조(烈祖)라 지칭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원성왕은 물과 인연이 깊었다. 괘릉은 원성왕릉이다. 곡사(鵠寺)의 연못을 메워 만들었다. 원성왕이 각간일 때,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흉몽을 꾸었는데, 아찬 여삼(餘三)이 '王' 꿈으로 해몽했고, 꿈☆은 이루어졌다. 그 후 왕족의 후원을 받는 김주원을 극복하려고 북천신(北川神)에 제사를 지내자 마침내 알천이 범람해 왕위에 올랐다. 원성왕 6년(790)에는 김제 벽골제를 크게 증축했고, 원성왕 11년(795) 당나라 사신이 왕경에 한 달 머물다 돌아가면서 술법을 써서 사못(東池)과 푸른못(靑池), 분황사의 우물에 사는 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하도록 해 통에 넣어갔다. 원성왕이 이를 알고 즉시 하양관까지 추격해 세 마리 용을 되찾아 제자리에 놓아주었다. 원성왕 14년(798년)에는 영천 청제(못)을 크게 수리하고 제사지냈다. 왕이 죽어 연못에 장사 지내고 관을 돌 위에 걸어 두었다가 흙을 쌓아 능을 만든 까닭도 물과의 인연이 아닌가 싶다. 현재까지도 능의 둘레에는 물이 배어나고 있다.

괘릉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문무왕릉으로 알았던 적이 있었다. 동해 대왕암이 발견되고, 최치원의 대숭복사비문에 의하여 원성왕릉을 조성한 곡사가 이전해 숭복사로 개명한 것 밝혀졌다. 문무왕릉 표지석을 뽑아냈지만 받침은 그대로 남아있다. 숭복사지는 괘릉에서 2km정도 떨어져 있다.
해설가 선생님의 해박한 해설을 들으니 천년 신라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역사는 달빛에 젖으면 야사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정사가 된다고 했던 누군가의 강연이 어렴풋하다. (2025.4.26.)





경주 원성왕릉(괘릉)
이른 점심을 먹고 을 찾아갔다. 평일이어서 도로가 한산해 즐거운 마음을 더 했다. 왕릉에 도착하니 햇볕이 따가워 그늘에 들어가니 벗어나기 싫었다. 주변에 잡초가 길게 자랐다. 추석이 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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