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5 DAY | 가스뜨로헤리스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그러려니하며살자 2025. 1. 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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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9.09:03경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를 당하신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국가 애도 기간: ~2025.1.4.)




15 DAY | 가스뜨로헤리스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2019.4.4.(목), 맑은 후 저녁 비.
46.5km(391.3km) / 11시간 19분



백 리가 넘는 길을 걸었다. 오늘 카미노는 다양했다. 큰 언덕을 넘었고 호젓한 평원을 지나 운하를 만났다. 목적지인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에 도착하니 소나기까지 내려 흠뻑 젖었다. 보름 동안 카미노를 걸으면서 처음으로 비를 맞았다. 알베르게에서 젊은 한국인들을 다시 만났다. 카미노는 만남과 이별의 각본 없는 드라마 무대다.

모스뗄라레스 언덕


알베르게에서 차려주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멀기만 한 갈길이 뚜렷하게 보이는 모스뗄라레스 언덕Alto de Mostelares으로 이어졌다. 까스뜨로헤리스를 빠져나와 나무다리를 건너니 오르막이 시작됐다. 아침 햇살을 받은 언덕이 붉게 변했다. 처음부터 힘을 빼지 않으려고 천천히 걸었다. 해발 940m 정상은 평평했다. 올라온 길을 뒤 돌아보니 지평선 위로 태양이 불쑥 솟아있었다.


모스뗄라레스 언덕을 내려서니 드넓은 밀밭이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을 배경으로 초록 밀밭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평탄한 길을 따라 삐수에르가 강을 건너는 이떼로 다리Puente de Itero에 도착했다. 11개의 아치 교각이 아름다웠다. 강은 부르고스 지방과 빨렌시아Palencia 지방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가스띠야 왕국과 레온 왕국을 나누는 자연 경계선이었다. 다리를 건너 빨렌시아 지방의 땅을 밟았다. 십여 분 뒤 이떼로 데 라 베가 마을에 도착해 레스토랑에서 카페 콘 레체(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마신 후 걸음을 재촉했다.


밀밭이 지평선을 이루었다. 허허로운 밀밭에 영화 배경처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한참 바라보았다. 고독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고독한 순례자에게 위안이 되는 나무였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 밀밭에는 살수 기계가 놓여있었다. 철관 뼈대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고 일정 간격으로 바퀴가 달렸다. 드넓은 땅을 농사짓기에는 인력으로 불가능하다. 밭에 물을 대는 장비는 필수겠다. 가까운 곳에 수로가 나타났다. 안내판에 Canal del Pisuerga(삐수에르가 수로)라고 적혀있다. 콘크리트 수로를 따라 시퍼런 물이 흘러간다. 드문드문 밭갈이한 땅이 나왔다. 너무나 넓어, 어떻게 갈았을까 궁금해졌다. 장비를 사용하더라도 하루 이틀로는 어림없는 규모다. 농사야말로 농부들이 골병을 얻는 지름길이 아닐까. 앞으로는 어떤 농산물이든 가격을 두고 허투루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오가 넘어 보아디야 델 카미노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성당이었다. 마을마다 성당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성모 승천 성당Iglesia Nuestra Senora de la Asuncion을 지나자, 광장 한가운데 7미터 높이의 원주탑이 보였다. 중세 시대 죄인을 묶어놓았던 심판 기둥Rollo Juridiscional이었다. 역사의 심판과 함께 세월에 바래 누렇게 변해 있었다. 광장 옆, 호텔 루랄에 들어가 바게트와 오렌지주스로 점심을 먹었다. 로비에는 카미노를 차량으로 투어하는 사람들의 여행용 가방 십여 개가 꼬리표를 달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의 열망을 이루는 최소한의 방법이다.


마을을 나와 20여 분 걸으니, 물이 도도히 흐르는 까스띠야 수로Canal de Castilla와 간이 계류장이 나왔다. 길섶까지 물이 찰랑거렸고, 배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운행하며 일반 5유로’라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었다. 1753~1859년 사이에 건설된 이 수로는 그 길이가 207km에 달하며 제방이 49개나 있다. 과거에는 하루 400척에 달하는 곡물 운반용 배가 수로를 따라 이동했다. 1959년 이후에는 관개용으로만 사용하다 최근 활발해진 카미노 순례의 영향으로 보트 운행 등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경이 아름다운 수로를 따라 30여 분 걸어가니 에스끌루사 수로 Canal de Esclusa 갑문이 나왔다. 높낮이가 다른 수로의 물 높이를 같도록 조절한다는 게 신기했다. 갑문 부근에 관광용 보트가 정박해 있고, 길가에는 ‘펼쳐진 책을 쇠사슬로 묶어 놓은’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왼쪽 면에 프로미스따Fromista 글씨와 수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수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석물 같았다. 갑문을 건너 도로에 내려서니 프로미스따였다.


앞서간 일행이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고, 멀지 않은 성 마르띤 성당Iglesia de San Martin으로 갔다. 성당은 11세기에 건립되었다. 외양이 아름답고 독특했다. 재빨리 돌고 나왔는데, 앞서가던 김상기가 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까스뜨로헤리스에서 출발한 순례자는 대부분 프로미스따에서 걸음을 멈춘다. 반면에 우리는 20km 앞에 있는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까지 여정을 잡았다. 순례를 마치고 남는 날짜를 이용해 대서양의 피스떼라까지 가려고 계획을 수정했다. 순례를 시작하고 조금씩 더 걸어와, 오늘은 백 리 길을 강다짐으로 걸었다. 이 나이에 무리라면 무리겠지만, 탈 없이 씩씩하게 계획한 페이지를 잘 넘기고 있다.


프로미스따에서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까지의 카미노는 도로와 나란히 있다. 도로를 따라 인도처럼 나 있는 카미노를 센다senda라고 부른다. 센다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길로, 순례자에게는 지루한 고행길이기도 하다. 센다를 네 시간 걸어 드디어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에 도착했다. 장장 46.5km다. 피로를 풀어주듯 하늘에서 소나기가 선물처럼 내렸다. 시원했다.

에스삐리뚜 산또 알베르게


노래하는 수녀가 있다는 산따 마리아 알베르게Alberque Parroquial de Santa Maria를 찾아갔다. 그런데 등록할 때 보니 에스삐리뚜 산또Espiritu Santo였다. 두 곳 모두 성당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건물이 유사해 착각할 만했다. 그런데 카미노에서 만났던 한국인들이 여럿 들어와 있어 반가워 오히려 잘 됐다. 방을 배정받은 후 배낭을 던져두고 우비도 없이 밖으로 나왔다. 허기진 배를 달래고 장보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