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추억

상서장과 고운대

그러려니하며살자 2024. 12. 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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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후 최 선생 유허비는 1978년 후손들이 세웠다. 비문은 역사학자인 이병도 박사가 지었다. 최치원은 고려 현종 때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됐다.

* 상서장(上書莊)
* 경상북도 기념물
* 현지 안내판 요지
상서장은 신라 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857~?)이 시무십조(時務十條; 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정책, 그 내용은 전해오지 않음)를 쓴 곳이다.
최치원은 12세 되던 해인 경문왕 8년(868)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해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자 애썼다. 특히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 자연과 벗 삼아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에 추봉되고, 공자묘에 배향하도록 했다. 이때 최치원이 머물며 공부하던 이곳을 임금에게 글을 지어 올린 집이라는 뜻에서 상서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 고종 때 건립한 비가 남아있고 상서장과 영정각, 추모문 등이 있다.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해 매년 4월, 제사를 지낸다.

* 답사 노트 :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 데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선생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듬어 보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 찾아갔다. 상서장은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상서장까지 가파른 계단이 높다랗다. 오른쪽에 비탈길이 나 있어 계단이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상서장을 둘러봤다. 인적 없는 탓인지 쓸쓸하고 적막했다. 고운대(孤雲臺)에는 시멘트로 만든 단이 귀퉁이가 삭아 떨어져 보기에 무상했다. 안내판도 노후해 글씨가 퇴색되고 때가 묻어 꾀죄죄했다. 고운대는 주차장 왼쪽에 있는 바위다. 높은 곳으로 상상했었는데 상서장보다 낮은 곳이었다. 고운대에 서서 -신라는 쇠퇴하고, 신생 고려가 부상하던- 그 시절 선생의 고뇌를 그려보면서 한동안 서성거리다 막막한 발길을 옮겼다. (2024.12.3.)

주차장에서 언덕 위 상서장으로 오르는 계단.
계단을 올라 상서장으로 들어가는 추모문
상서장이란 임금[진성여왕]에게 글을 지어 올린 집이라는 뜻.
영정각에서 매년 4월 제사를 지낸다.
19세기 중엽까지 상서장에는 아무런 건물이 없었다. 조선 고종 13년(1876)에 부윤 이돈상이 글을 지어 세운 비각이 가장 먼저 건립됐다.
문이 닫힌 전시관.
상서장 전경
고운대. 시멘트 단이 노후했다. 왜 만들어졌는지 의문이 든다.
고운대 전경. 바위가 있는 좁은 터다.
한시 泛海(범해) 시비. 2013년 6월 시진핑 주석은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최치원의 한시 '범해'를 인용했다. 2014년 7월 서울대 특강에서도 최치원을 한중 양국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론해 각별한 관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추모문에서 내려다본 가파른 계단.

최치원

통일신라 의 6두품 출신 문인. 최승우 , 최언위 와 함께 신라삼최 중 하나로, 한국 유학 과 문학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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