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추억

대릉원 일원과 오릉 탐방

그러려니하며살자 2024. 12. 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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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교를 건너면서 바라본 형산강, 멀리 서천교가 보인다.

걷는 데 아직 큰 불편이 없어 도보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숙소를 나와 걸어서 경주문화원을 거쳐 대릉원 일원과 첨성대까지 갔다. 늦은 점심을 먹고 포석정에 가려는데 경주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차를 가지고 나타났다. 덕분에 포석정과 오릉은 걷지 않고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경주는 능의 도시다.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의 무덤이 몰려있다. 능의 주인을 대부분 알 수 없다. 대릉원 일원과 오릉에도 일부에 관해 추정만 할 뿐 비석이나 표식이 없었다. 마치 무명의 공동묘지와 다름없다. 발굴 조사를 해도 주인을 알 수 없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생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말하랴'[논어 선진편]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24.12.2.)

노동동 고분군. 4~6세기 고분으로 봉황대를 중심으로 4기가 있다. 대부분 신라 마립간 시기의 고분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성덕대왕신종을 매달았던 종각이 있었던 터이기도 하고, 경주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이기도 하다.
금관총(보존 전시 공간).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재발굴 과정에서 금관총에 묻힌 주인공은 이사지왕으로 밝혀져, 경주 지역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고분이 됐다.
노서동 고분군. 이곳에서 13기 고분이 확인됐다.
대릉원 황남대총. 황남대총은 황남동에 있는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뜻으로 불여진 명칭이다.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블어 있으며, 남쪽 무덤을 먼저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을 잇대어 만들었다. 남분에는 남자가, 북분에는 여자가 물혔으며, 부부로 추정된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마립간 시기의 왕릉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단풍나무와 겨울눈을 만든 목련이 눈길을 끌었다. 두 나무의 대비가 극과 극이다.
대릉원 천마총은 신라의 대표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이다. 1973년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히 남은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에서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했다. 광복 후 처음으로 신라 금관이 출토되었으며, 많은 금 공예품과 유리그릇 등 귀중한 유물이 출토됐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서기 500년 전후로 추정된다. 무덤의 주인을 왕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무덤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복원해 주요 출토 유물을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천마총 무덤안 돌무지는 고대 신라 마립간 시기에 축조한 실제 유적이라고 표시돼 있다. 대략 1,600년 전에 쌓은 실제 돌무지를 경외심으로 어루 만지고 싶었으나 금지돼 있었다.
미추왕릉. 신라 최초의 김 씨 왕으로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했던 신라 13대 국왕 미추 이사금(재위 262~284) 능으로 유일하게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었다.
대릉원 정문. 대릉원은 황남동 고분군으로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 30기의 무덤이 있다.
월정교는 오릉과 포석정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외국 관광객이 많았다. 본래 다리는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복원은 거의 상상에 의존했다고 한다.
경주 오릉 입구
삼국사기에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 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고 돼 있다.
고라니
고라니가 고분에서 안식을 취하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혼비백산 달아났다. 저 만큼 우리도 선량한데….
능원 안에 있는 알영정. 박혁거세 왕비 알영이 태어난 우물(돌로 막아 놓은 곳). 정자 안에는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 비가 있다.
박혁거세왕을 제향하는 숭덕전의 영숭문. 누구나 함부로 들오지 않도록 석조물로 금지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