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화 '청춘의 십자로'
지난 22일(금) 대구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방화 <청춘의 십자로>를 감상했다. 시니어클럽 K 선생의 연락을 받고, 내심으로 옛날 영화는 시시할 텐데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막상 영화를 보니 선입견과 달리 너무 재미있었다.
<청춘의 십자로>는 흑백 무성영화다. 무대 스크린 오른쪽에 등장 배우들의 대사와 영화 속 분위기를 해설하는 변사가 자리하고, 왼쪽에는 배경음악과 효과음을 담당하는 악대 -콘트라베이스, 아코디언, 바이올린, 전자 피아노- 연주자 4명 그리고 뮤지컬 배우 남녀가 시의절하게 출연해 열창한다.
◇제작연도: 1934년
◇제작사: 금강키네마
◇각본/감독: 안종화
◇출연: 이원용, 신일선, 김연실, 박연, 양철, 문경심
◇개봉: 1934.9.21. 조선극장
◇상영시간: 80분
영화는 1934년 경성, 서울역에서 수하물 운반 일을 하는 주인공 영복(이원용 扮)이 늙은 모녀의 무거운 짐 보따리를 들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성품이 착하고 우직해 고향에서 봉선네 집 데릴사위로 들어가 7년 동안 일했으나 주명구(양철 扮)에게 봉선(문경심 扮)을 빼앗기게 되자, 늙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겨둔 채 서울로 왔다. 어느날 주유소에서 급유 일을 하는 계순(김연실 扮)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다. 계순은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빚에 시달리며 근근이 살아가는 불우한 처녀였다. 한편, 고향에 남아 있던 여동생 영옥(신일선 扮)은 어머니가 죽자 서울로 올라와 오빠를 찾지 못하고 카페의 여급이 된다. 영옥은 같은 시골에서 사고를 치고 올라온 주명구의 술책에 넘어가 그와 친구인 사채업자 개철(박연 扮)에게 능욕을 당한 후 동거한다. 어쩔수 없이 그들과 골프장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든다. 이때를 전후해 계순이 실직해 직장을 찾아 헤매다 개철 일당에게 걸려든다. 사채 대출을 빌미로 개철에게 농락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 사실을 알게된 영복은 개철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뜻밖에 여동생 영옥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듣고 분노한다. 여동생을 괴롭히고 사랑하는 애인마저 농락한 개철에게 분노한다. 영복은 카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개철과 주명구를 찾아내 마침내 분노의 주먹을 날려 응징한다. 애인 계순과 만난 영복은 여동생 영옥을 데리고 새출발을 다짐하며 해피엔딩의 막을 내린다.
무대 풍경이 낯설고 흥미로웠다. 변사의 화려하고 능수능란한 구연(口演)은 재미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같은 목소리로 여성의 역할도 소화했지만, 어색하지 않게 영화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변사가 주인공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악대의 리얼한 연주와 가수의 생생한 열창이 뮤지컬 쇼를 보는 듯했다.
영화는 통속극이다. 등장 배우들의 순정 연기가 일부 억지스러워 보였으나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르는 은유적 묘사는 일품이었다. 지게 지고 소 몰던 시절에 대형 벽시계가 보여주는 시각에 맞추어 서울역으로 들어오는 증기기관차, 인파가 넘쳐나는 플랫폼, 처음 보는 승강기, 자가용, 주유소 급유를 하는 직업여성, 생소한 골프 영상이 서울의 문명 된 풍경을 은근히 나타낸다. 서양 패션, 노동자인 영복이 바나나로 배를 채우는 장면은 1934년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됐을 거였다. 저고리 옷고름의 긴 끝을 만지작거리는 처녀의 손길이 클로즈업되고, 바닷가에 데이트를 나가 시간을 끄는 언행, 여성을 상징한 사과, 우물가 대화 등은 성(性)의 은유였다. 영복이 개철 일당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은 복수뿐만 아니라 권선징악적 요소도 가미됐다.
현대 영화처럼 다양한 복선이 깔려 있지 않아 스토리의 이해가 쉬워 유쾌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구십 년 전의 시대로 돌아가 웃고, 탄식하고, 슬퍼하고, 환호했다. 멋진 연출에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참고로, <청춘의 십자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였으나 2019년 러시아에서 1920년대 것으로 추정하는 이규설 감독의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 필름이 발견돼 두 번째로 밀려났다. 무성영화의 꽃인 변사는 발성영화(發聲映畫, talkie film)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숱한 애환을 남기고 사라졌다. (2024.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