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의 이공제 비각
신천 상동교 인근 도롯가에 낯선 비각이 보인다. 둔치를 걷다가 비각에 가려면 계단을 올라야 한다. 비각 안에 옛 비석 3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왼쪽과 가운데는 이공제(李公堤) 세 글자가, 오른쪽은 군수 이후범선 영세 불망비(郡守李侯範善永世不忘碑) 열한 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은 신천 치수에 공이 큰 목민관의 공덕을 기리고자 백성들이 세운 송덕비라고 한다. 대구시에서 신천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 비각을 만들어(3평) 이서공원이라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매년 음력 1월 14일, 수성문화원에서 이서와 이범선을 신천의 호안신(護岸神)으로 받들어 비각 앞에서 향사를 모시며 수해 없기를 기원한다.
<이공제>는 1778년(정조 2) 대구 판관 이서(李溆)*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신천에 제방 10여 리를 쌓아 하천 범람을 막았다. 이의 치적을 기리려고 1797년(정조 21) 세운 비석이다. 가운데 큰 비석은 앞서 세운 비석이 초라하다 하여 11년 뒤 1808년(순조 8) 다시 세웠다. 비석 뒷면에 이공(李公)의 치적을 영구히 기리려고 다시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조선 시대 대구는 지대가 낮아 큰비가 오면 신천이 범람해 향교와 대구부 관아가 잠기고 백성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이서가 백성의 부담이 없도록 사비를 들여 신천에 제방을 쌓으므로 물이 범람하지 않게 됐다. 이에 감동한 백성들이 그의 공로를 기리려고 신천 제방을 ‘이공제'(이공이 만든 제방)라고 명명하여 비석을 세웠다.
오른쪽의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개항기*의 대구 군수 이범선*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1898년 고종 35년(광무 2)에 신천에 큰 홍수가 발생해 '이공제'의 하류 부분이 유실돼 대구읍성이 침수 위험에 처하자, 짧은 기간에 긴급하게 보수공사를 완료해 주민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이듬해 주민들이 그 공덕을 기려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두 목민관의 애민 정신의 뜻이 담긴 송덕비는 오늘날에도 귀감이 될 것이 분명하다. (2024.11.7.)
* 이서(李溆, 1732~1794): 자는 계호(季浩), 호는 부계(鄜溪)로 대구 판관(1776.7~1778.7)을 지낸 후 남원 부사, 광주, 나주, 황주, 여주 목사를 거쳐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 개항기(開港期):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무렵,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요구로 문호를 개방해 외국과 통상하기 시작하는 시기.
* 이범선(李範善, 1835~1905): 자는 치원(穉元), 호는 수서(水西)로 대구 군수를 지냈으며 이후 호조정랑과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