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동 일원 답사
지인 소개로 매달 한 번 Y 교수님을 따라 답사 공부한다. '답사'라는 용어가 전문가 전용인 것 같아 부담스럽지만, 한 번 빠지지 않고 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곳을 방문하면 '여행, 관광, 구경, 탐방' 등 쉽고 편안한 단어를 주로 차용한다.
답사에 나서기 전 사전 자료를 읽고 가지만, 교수님의 현장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경청하면 답사지의 역사적 가치와 관련 인물, 사회적 영향 등 어느 것 중의 하나라도 느껴지는 바가 있다. 가장 와닿는 부분이 관련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들이 모두 산소 같은 위인들이었다. 답사란 어쩌면 위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행위가 아닌지 모르겠다. 비가 내리는 데 남산동의 네 곳을 다녀왔다.
◇대구 이육사 기념관
지난해 11월 16일 하늘도 슬픔을 아는 듯 이육사 기념관 개관일에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1923년 그가 스무 살 때 가족들이 안동에서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했다. 몇 년 전 이육사가 살았던 집이 재개발로 철거됐다. 이를 아쉬워하는 시민의 뜻을 받들어 시공사가 기념관을 지어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이육사(1904~1944)의 본명은 이원록.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이다. 1927.10.18.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때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그는 독립운동하면서 1933년 육사라는 이름으로 시단에 데뷔했다. 17번의 투옥을 반복하다가 1944.1.16.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 후 문인들에 의해 《육사 시집》이 간행됐고, 고향 안동에 시비와 문학관이 건립됐다. 교수님은 이육사의 일생에 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을 하셨고, 육사와 관련해 포항 옥룡암과 구미 채미정, 왕산 허위 기념관의 방문을 추천했다. 삼 년 전, 개인적으로 안동 문학관에 갔다가 따님인 이옥비 여사를 만났다. 마음으로는 이육사 선생을 뵙는 듯했다.
◇전태일 대구 남산동 옛집
전태일(1948~1970)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가 가장 행복했다는 때는 노동운동 이전의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현재 명덕초교 강당 자리)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학교 인근에 그가 세 들어 살았던 옛집을 갔다. 좁은 골목길 안에 있는 작은 한옥의 마당 단칸방이었다. 이 집은 2020년 서거 50주기에 시민 성금으로 매입했다. 그가 살았던 단칸방을 복원 중이었다. 기념관이 꾸며지면 다시 와야겠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생계를 위해 신문팔이 등 잡일을 하며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10대 후반,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바보회' 등의 단체를 만들어 정부와 사업주에게 근로기준법에 따라 근로조건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해 1970.11.13. 분신자살해 23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희생으로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되어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이 본격화됐다. '전태일 평전'은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조영래 변호사가 집필했다. 서울의 전태일 기념관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다.
◇성유스티노 신학교
천주교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Florian Demange, 한국명 안세화) 주교가 대구 지역 최초로 지은 신학교다. 1913.9월, 중국 상하이에서 익명의 신자가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2만 5,000프랑의 헌금을 보내오고, 신도 서상돈이 땅을 기증해 1914년 설립했다. 개학식과 함께 57명의 신학생이 등록했다. 총독부 인가를 받지 못해 1944.12.23. 서품식을 끝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됐다. 이후 1946.9월 대건학교에 인수되어 대건중고등학교로 사용되었다. 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이전해 성당을 포함한 건물의 중앙 일부만 남기고 철거했다. 본래 건물을 축소한 것인데 옳은 일인지 따져볼 사람은 없다. 성유스티노 신학교는 대구 천주교의 종교사적 가치와 서구의 근대 건축 양식을 담고 있다.
◇성모당
천주교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Florian Demange, 한국명 안세화) 주교가 1917.7월부터 1918년에 걸쳐 건립했다.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굴을 모방하여 지었다. 중국인 강의관이 공사했다. 성모당 규모는 125.4㎡, 북향 배치된 붉은벽돌로 쌓은 건물로 앞쪽에 넓은 마당을 두었다. 내부는 암굴처럼 꾸미고 그 위에 마리아상을 두었다. 동굴 윗면에는 1918.5.30. 안세화 주교가 직접 새긴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이라는 글귀가 있다. 1911은 대구대교구가 처음 생긴 해, 1918은 안세화 주교가 교구를 위해 신에게 청한 세 가지 소원이 모두 이루어진 해이다. 라틴어 글귀는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에게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 오후 시간임에도 성모당에서 기도하는 신자가 많았다. (202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