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추억

경주 수운 최제우 생가

그러려니하며살자 2025. 3. 2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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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가정길 33-29


경주 나들이 길에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생가에 들렀다. 월, 화요일은 관람 휴무여서 대문이 잠겨 들어가지는 못했다. 담장 넘어 생가를 살펴보고, 입구에 있는 유허비와 숭모비를 보고 돌아왔다. 지난해 7월 용담정과 생가를 탐방한 적이 있긴 하다. 조선 시대의 양반집은 대문, 사랑채, 안채가 거의 일직선으로 복원한 주택들은 어디서 보나 대부분 비슷했다. 생뚱맞지만, 요즘처럼 고층 아파트에 나고 자라는 큰 인물의 생가를 150년 후 복원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살짝 궁금해진다. 수운은 1864.3.10. 대구 장대(관덕당)에서 참형당했다. 생가에서, 41세에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2017. 5월, 형장이었던 자리(대구 현대백화점 앞 인도)에 순도비가 세워졌다. (2025.3.24.)

이곳은 수운 최제우선생이 탄생한 유서 깊은 곳이다. 선생께서 태어나던 날 구미산이 3일을 울고 상서로운 기운이 집을 둘렀다고 한다. 수운대신사는 포덕1년 경신(1860년) 4월 5일 구미산계곡(용담정)에서 무극대도를 득도하였다. 포덕 5년 갑자(1864년) 3월 10일에 대구 장대에서 순도한 후 여기에 빈터만이 남았다. 1971년 8월 빈터만 남아 있던 이곳에 정부의 도움과 교단의 정성으로 유허비를 세웠다. (현지 안내판 간추림)


水雲 崔濟愚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 창시자이다. 1824년(순조 24)에 태어나 1864년(고종 1)에 사망했다. 몰락양반가 출신으로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천명을 돌보지 않아서임을 깨닫고 천명을 밝히기 위한 구도와 수련에 전력을 다했다. 1860년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이치를 체득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한 이후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자 조정은 두려움을 느끼고 제자 20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했다. 서울로 압송 중 철종이 죽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참형에 처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시천주(侍天主):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심.
* 좌도난정(左道亂正): 도를 그릇되게 하고 바름을 어지럽게 하는 일이라는 뜻. 당시에는 유교를 어지럽히고 법도를 어긴다는 의미였다.



수운 최제우 생가는 복원한 것이다. 본래의 생가는 20세 무렵에 화재로 소실되어, 그 동안 유허비로써 표지해 왔다. 경주시에서 동학의 문화유적을 되살리고자 복원했다.
대문의 관람 시간표.
숭모비
유허비
순도비. 수운이 참형당한 자리(현재 대구 현대백화점 앞 인도)에 2017. 5월에 세웠다.